Rendez-Vous
랑데-부
2022. 09. 02
1. Broken Stadium (Minseok Choi)
2. Blink (Minseok Choi)
3. Telepathy (Minseok Choi)
4. Sunrise (Youngeun Jang)
5. Family Business (Youngeun Jang)
6. Fantastic (Youngeun Jang/Minseok Choi)
7. Mad World (Roland Orzabal)
8. Why Can I Not (Jungho Kang)
9. I Want (Minseok Choi)
10. Monument (Minseok Choi)
[Rendez-Vous]
〈Broken Stadium〉.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건만 어느덧 삶은 내가 품었던 생각과 다른 지점에 와 있다. 어긋나고 있다는 낌새가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 이리 됐는지 알 수 없다. 내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을 테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다. 그토록 웅장해 보이던 어린 시절의 운동장이 이제 와 보니 아담하고 초라하다. 운동장은 제 역할을 다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Blink〉. 앞 차가 깜빡깜빡 비상등을 켠다. 나도 브레이크를 밟으며 비상등을 켠다. 비상등 단추에 불이 들어오면서 까딱까딱 소리가 난다. 백미러를 보니 뒷차 역시 속도를 늦추며 비상등을 켠다. 저 차 안에서도 까딱까딱 소리가 나겠지. 옆 차선에서도 줄줄이 비상등을 켜고 있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반대편 차선도 마찬가지. 깜빡깜빡 까딱까딱. 신호등도 노란불이 깜빡인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까딱까딱 소리에 호응하듯 핸드폰 화면에서도 형광 연두색 조명이 깜빡인다. 길가 사무용품점의 간판도 깜빡깜빡. 정지한 차의 행렬 너머로 보이는 건물의 창 여기저기서 각기 다른 박자로 깜빡이는 조명. 깜빡깜빡 까딱까딱 깜빠바박 까따가닥 따가다가다가다. 깜빡임의 오케스트라.
〈Telepathy〉. 암전. 댄서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선글라스의 렌즈는 불투명한 재질이라 댄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댄서는 모자, 장갑, 신발까지 일체형인 점프 수트 차림인데 형광색 조명이 장착된 튜브가 온몸에 휘감겨 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Money for Nothing〉 뮤직비디오나 영화 《트론》의 장면같다. 댄서는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휘젓는다. 몸이 떠오르더니 회전하기 시작한다.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또는 어딘가에 가 닿으려고 애쓸수록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닿을 것인가 닿지 못할 것인가…
〈Fantastic〉. 내가 피아노를 해서 다행이야. 덕분에 장영은, 강정호와 팀이 될 수 있었어. 최민석이 말했다. 내가 베이스를 해서 다행이야. 덕분에 강정호, 최민석과 팀이 될 수 있었어. 장영은이 말했다. 내가 드럼을 해서 다행이야. 덕분에 최민석, 장영은과 팀이 될 수 있었어. 강정호가 말했다. 판타스틱!
일시 정지.
곡명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연주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써 나가다 멈췄다. 이상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그리면서 음악을 들은 적은 없다. 라이너 노트를 써야 하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뭐든 해보려고 친 몸부림이 분명했다.
얼마 후 더티블렌드는 난관에 처한 나를 돕고자 베이시스트 장영은과 드러머 강정호가 각 곡에서 떠올린 심상 메모를 건넸다. 〈Broken Stadium〉에는 “우리의 젊음과 꿈을 기억하던 경기장은 무너졌고,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장영은), “All the glory is in vain, in history. What's left is only NOW.”(강정호), 〈Telepathy〉에는 “볼 수 없지만 들리는, 만질 수 없지만 보이는, 만날 수 없지만 느껴지는.”(장영은), “We are living in a touchless, heartless generation always hoping to make connections to one another. Be here, right now, in person.”(강정호)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미있는 건 〈Fantastic〉(“환상적이었던 닉스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의 추억. 본 조비는 나의 우상, 에릭 마틴은 나의 전부였다.”(장영은), “Teenage dream. Pure innocence. Not knowing or caring for the future. Care-free. It WAS a fantastic time.”(강정호))의 뭔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심상이었고 특히 〈Blink〉(“흥분하며 허언을 쏟아내던 한 친구는 끝까지 자기가 보았다고 우겼다. 나는 그를 믿는다.”(장영은), “Endless dance. Eternal dream. Only happens in one blink.”(강정호))의 대조적인 표현은 압권이었다. 〈Blink〉를 연주할 때 장영은은 끝까지 자기가 보았다고 우기며 흥분한 상태로 허언을 쏟아내던 친구를 믿는 마음으로 베이스를 치고 강정호는 한순간에 영원을 춤추는 마음으로 드럼을 쳤던 것일까? 그럼 듣는 우리도 다른 마음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괜찮아 보이고, 귀엽다고 생각하고 보면 귀여워 보이는. 귀에 걸면 귀고리 목에 걸면 목걸이라는 말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빨래판도 악기로 쓸 수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을 없는 척할 수도 있고 거짓말도 진실이 된다.
사실 뮤지션의 심상은 우리의 음악 생활과 별로 상관이 없다. 대체 누가 뮤지션의 의도나 심상을 염두에 두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가며 음악을 듣나. 코드 진행이 어쩌고 하면서 곡의 구조와 형식을 설명해봐야 나처럼 음악 지식이 없는 사람한테는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 전문지식이 없다고 해서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니다. 요리를 못해도 맛을 느끼는 데 지장이 없고 작가가 아니더라도 온갖 책을 읽을 수 있듯 음악 전문지식이 없어도 음악을 듣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음악은 묘하다. 소리의 길이와 높낮이의 조합으로 감정을 좌지우지한다. 미술이나 문학도 감정을 좌지우지하지만 음악만큼 모호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모호해서 강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호하다는 건 정해진 방식이 없다는 뜻이고, 듣는 사람이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니까.
최민석은 스스로 ‘썸띵뤙’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하곤 한다. 딱이다. 더티블렌드의 〈Black Comedy, Jack〉을 처음 들은 건 최민석과 더티블렌드의 합주실이자 가끔씩 공연장으로도 쓰이는 문래레코드에서였다. 잭 블랙에게서 영감을 받은 곡이라는데 잭 블랙보다 더 잭 블랙스러웠다. 뭔가 더티하고 썸띵뤙한 분위기. 잭 블랙을 연주하는 곡이 뭔가 더티하고 썸띵뤙했다면 완전 제대로라는 뜻이다. 잭 블랙은 늘 더티하고 썸띵뤙하지 않은가. 그런데 〈Black Comedy, Jack〉뿐 아니라 연주 전체가 더티하고 썸띵뤙했다. 더티블렌드의 강렬한 인상은 ‘썸띵뤙니스(something-wrong-ness)’에 기반한다. 썸띵뤙니스는 거저 얻어지는 미덕이 아니다. 자신(“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거나 어떤 일이 꼭 그렇게 되리라는 데 대하여 스스로 굳게 믿음”—표준국어대사전) 없이는 썸띵뤙니스도 없다. 머뭇거리지 않고 할 말을 하되 우리 방식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사운드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어릴 때 헤비메탈을 듣던 사람이 성인이 되면 재즈를 듣는 경우가 많다. 전설적인 밴드엔 천재적인 연주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황홀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어른스러운’ 장르는 재즈 뿐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이 한 말이다. 바로 납득했다. 어른스러움이 무엇인지, 헤비메탈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뜻인지에 대해서는 일단 넘어가자. 요점은 천둥신의 떠들썩한 박력과 잭 블랙의 요망한 삐딱함이 섞인 황홀한 연주를 들려주는 ‘어른스러운’ 밴드가 더티블렌드라는 것이다.
새 앨범명을 《랑데부》로 정하긴 했는데 ‘Rendezvous’라고 쓸지 ‘Rendez-Vous’라고 쓸지 고민중이라는 말을 듣고 주억거렸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Rendezvous는 ‘만남(특히 밀회)’이라는 뜻이고, 두 우주선이 동일한 궤도에 진입해 아주 가까이 접근하는 운동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Vous(당신)’를 특별히 강조해 이 음반으로 여러분과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표기라고 해석했다. ‘Rendezvous/Rendez-Vous’는 여러 갈래로 읽을 수 있다. 거의 무한대로 가능한 잠재 연주 중에 실현되고 선택된 수록곡도 랑데부의 발현, 드러머 강정호가 새로이 합류해 더해진 묵직한 레이어도 랑데부의 발현, 수많은 디자이너 중 내가 이 앨범을 맡았기에 구현된 형태 역시 랑데부의 발현이다. 이 음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제 여러분의 몫으로 남은 랑데부다.
+
더티블렌드를 듣는 재미 가운데 하나는 앨범을 내거나 공연을 할 때마다 적어도 한 곡씩 연주되는 리메이크다. 《Sonatinen Lessons》는 아예 리메이크 프로젝트였고, 《Badman Bossa》에는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가, 《Rendez-Vous》에는 티어스 포 피어스의 〈Mad World〉가 수록됐다. 더티블렌드가 무엇을 들으며 음악을 해왔는지, 원곡이 어떤 덧질(touch)로 더티블렌딩 되는지 엿볼 수 있어 무척 흥미롭다. 원곡이 다양한 아티스트의 퍼포먼스에 따라 새로이 변형되는 음악 특유의 형식을 ‘블렌딩’이라 일컬어도 될 텐데, 더티블렌드가 블렌딩하는 방식을 보면 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헛된 말은 아닌 것 같다.
디자이너 이기준
Track List
01 Broken Stadium (Minseok Choi)
*Minseok Choi Music
02 Blink (Minseok Choi)
*Minseok Choi Music
03 Telepathy (Minseok Choi)
*Minseok Choi Music
04 Sunrise (Youngeun Jang)
*Youngeun Music
05 Family Business (Youngeun Jang)
*Youngeun Music
06 Fantastic (Youngeun Jang/Minseok Choi)
*Youngeun Music/*Minseok Choi Music
07 Mad World (Roland Orzabal)
*Roland Orzabal Limited./Fujipacific Music Korea Inc.
08 Why Can I Not (Jungho Kang)
*JKang Music
09 I Want (Minseok Choi)
*Minseok Choi Music
10 Monument (Minseok Choi)
*Minseok Choi Music
Credits
Produced by DIRTY BLEND and Lee Soop
Piano - Minseok Choi
Bass - Youngeun Jang
Drums - Jungho Kang
Recorded by Lee Soop at Gloriagain Studio, April & June, 2022.
Assisted by Seunghun Lee
Mixed by Lee Soop at Soop Records
Mastered by Seunghee Kang at Sonic Korea Mastering Co., Ltd.
Design by Ki-Joon Lee
Photo and Art Work by Jiho Kim ("House Warming", "Triceratops")
Disc Manufactured by M - Tech
Printed by Doolee Printing